남자는 스케치를 한다.
직선적이고 굵은 선들로 항상 무엇인가를 묘사해야하는, 아니 해내야만 했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아니면 가장 난이도가 높아 남자가 특히 싫어했던 풍경이든, 남자는 눈앞에 놓인것을 가장 올바르게 묘사해야 했다.
캔버스는 끊임없이 늘어난다.
작업을 마치고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며 뒤돌아보면 어김없이 새로운 작업물이 산더미처럼 놓여있다.
'지들이 그리던가...'
눈앞에 보이는게 좋으면 가서 10분이라도 더 지켜볼 것이지, 애초에 온전히 담을 수 없는것을 왜 이 거대한 캔버스에 그리라고 하는지 남자는 통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만두는 순간까지도 알지 못할것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묵묵히 매일같이 스케치를 이어갔다.
가끔 오늘 작업 결과물에 뿌듯할때도 있었지만, 자신의 실력에 대한 근원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어릴적부터 곧잘 해왔으니까, 부모님이 특히 좋아하니까.
남자치고는 고운 오른손에 얹은 스케치 연필의 무게감이 나날이 더해져도, 남자는 이 삐딱한 완벽함을 근거로 오늘도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지 않아도 돼"
물감을 파는 옆집 여자의 말을 듣고 남자는 처음으로 여지껏 걸어온, 한치 오차도 없었던 자신의 불편한 완벽감에 새로운 잣대를 들이밀어본다.
숨막히듯 촘촘한 완벽을 구축한 그 스케치 자국 틈새의 흰색 여백에 깃든 그의 결핍을 알아챈 것일까?
빠르고 정교함이 전부였던 완벽한 그의 세상에서 균열을 발견할 수 없다면, 뒤집어 뒷면을 보는것이 역설적인 또 하나의 방법임을 남자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어떡해?"
눈에 띄게 고민이 많아진 눈으로 소심히 물어본다.
"그건 너가 알겠지. 너가 그리고 싶은건 뭔데?"
내가 그리고 싶던 것. 까마득히 잊고있던 생각의 복기에 연필심이 툭 부러지듯 남자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진다.
"몰라 잘 모르겠어. 고민은 해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잘 모르겠네"
"로즈 퍼플"
"...?"
"로즈 퍼플색이야"
고개를 들어보니 치약 반통 남짓한 크기의 물감을 여자가 건넨다.
'로즈 퍼플색이라니 이름부터 엉망이잖아? 이 색은 아무곳에도 못써먹겠네'
남자가 생각하기 무섭게 여자가 말을 뱉는다.
"그 물감으로 칠하고 싶은것을 아무거나 그려봐. 아무곳에도 안어울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흠칫 놀라면서도 주섬주섬 물감을 받아든 남자는 그대로 집에왔다.
그날 남자는 스케치를 하지 않았다.
아니, 스케치를 하지 않아도 이유 모를 충만함을 느꼈다.
처음으로 눈앞이 아닌 머릿속의 영감에 집중하며, 또 여자에게 보여줄 결과물을 즐겁게 상상하며 그녀가 건넨 물감을 한웅큼 짜본다.
내면의 심해에서 울려오는 잔잔한 파동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붓질을 이어가 본다.
잔잔하고 깊은 파동. 어쩌면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짓눌러온 무게를 세 손가락과 연필로 지탱할동안, 남자가 외면해온 구조신호가 아니었을까.
그날 남자는 스케치를 하지 않았다.